2014년 8월 8일 금요일

[논단] 소통의 윤리

"한국교회, 소통의 윤리가 필요하다." 얼마전 한국기독교윤리학회가 '소통의 윤리와 기독교의 책임'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었는데, 한국사회와 교회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전제 하에 서로의 불통의 벽을 허물기 위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왔다고 한다.

'한국교회에 필요한 소통의 윤리'는 무엇일까? 필자가 생각하고 있는 두가지를 제시해 본다.



요즘 소통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지만 소통을 이해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소통을 의사전달의 수단으로 인식한 서양에서는 고대부터 소통의 기술을 발달시켜 왔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웅변가들은 어떻게 상대방을 설득할 것인지 연구해 수사학을 발전시켰다. 수사학은 곧 남을 설득하는 기술이라고 볼 수 있다. 서양에서 말이나 글은 설득의 수단이다. 언어를 예술적으로 구사해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이 소통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소통을 수단으로 보기보다는 윤리적 관점에서 보아왔다. 이는 공자의 '정명(正名) 사상'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날 공자의 제자가 공자에게 물었다. "위나라 군주께서 선생님을 맞아들여 정치를 하게 된다면, 선생님께선 장차 무엇부터 시작하시겠습니까?" 공자가 답했다. "꼭 이름(名)을 바로 세울 것(正名)이다." 공자는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고 이름을 바로세우는 것에 대해 설명했다. 임금이 이름만 임금이라고 불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는 말이나 지위보다 행함을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자는 말하기 전에 행하고 그 행함에 따라 말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교회에도 이런 소통의 윤리가 필요하다. 교회는 말이 많은 곳이다. 그 말들이 영향력을 가지려면 이에 걸맞는 행동이 필요하다. 곧 교인이 교인답고, 목사가 목사다우며, 장로가 장로답고, 권사가 권사답게 행동해야 한다. 이름에 걸맞는 행동이 있고 난 후 말이 따를 때 그 말이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인터넷 같은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은 더 많은 말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수 많은 말들 속에서 교회가 전하는 메세지가 힘이 있으려면 교회가 교회다워야 한다. 세상 사람들보다 더 많이 봉사하고 더 섬기려 할때 사람들은 교회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다음으로 올바른 소통과 잘못된 소통에 관한 윤리적 기준이 있어야 한다. 무엇을 목적으로 소통하는지 윤리적 판단을 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하다. 여러가지 기준들이 제시될 수 있지만 특별히 소통의 목적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충만함(요 10:10)이다. 곧 생명의 소통이 소통의 목적이다. 소통에는 상대방을 속이고 억누르며 복종시키고 고통을 주려는 목적의 소통이 있는 반면 상대방을 인정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생명을 살리려는 소통이 있다. 즉 파괴하고 죽이려는 목적의 소통과 살리고 삶을 더 풍성하게 하려는 목적의 소통이 있는 것이다.

지난해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를 주제로 부산에서 총회를 열었다. 총회를 마치며 WCC는 생명의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정의와 평화의 순례에 전 세계 교회들이 함께 하도록 초대하는 메세지를 채택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지키시며 더 풍성하고 충만하게 하신다. 한국교회가 가져야 할 올바른 소통의 윤리는 바로 이 땅에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생명을 살리고 더 풍성하게 할 수 있는 소통이어야 한다. 이 소통의 윤리는 가정에서부터 시작해, 교회와 사회와 피조물 세계 전체에 적용되어야 한다.

천영철 목사
WCC 아시아지역 커뮤니케이션 담당관

[기독공보 2014년 05월 27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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